王都人 다운 자긍심 갖자
王都人 다운 자긍심 갖자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6.10.24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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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성 名品만들기-11. 전략④.

 전주의 옛지명은 ‘완산주’였다.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완전하다’, ‘온전하다’란 뜻을 담고 있는 온전할 전(全) 자를 사용해 ‘전주(全州)’로 개명됐다. 2016년 현재 1259년 동안 전주란 지명을 이어오고 있다.

전주는 여느 도시와는 달리 전주만의 정신(精神)을 지니고 있다. ‘전주정신(全州精神)’이 그것이다. 전주는 어려움 속에서도 새 생명을 틔워내는 강인한 힘이 있는 ‘꽃심’의 도시다. 최명희 작가는 「혼불」에서 전주를 ‘꽃심을 지닌 땅’이라고 했다. ‘꽃심’에는 ‘대동’ㆍ‘풍류’ㆍ‘올곧음’ㆍ‘창신’의 정신이 담겨 있다. 대동은 모두가 함께하는 포용과 배려의 정신이며, 풍류는 예술을 아끼고 즐기는 심성, 올곧음은 선비의 절의 정신이요 민초들의 곧은 정신, 창신은 전통을 토대로 새로운 세상을 창출해가는 정신이다.

전주는 또 왕도(王都)다. 후백제 견훤대왕의 도읍지였으며, 조선왕조의 발원지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세계역사상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관·민협치’의 꿈을 실현했던 곳으로 아시아 근대 민주주의 성지이기도 하다.

이에 본보는 전주인(全州人)은 왕도인(王都人)으로서의 ‘문화자긍심’을 갖고 미래사회를 열어나가야 함을 제안하고자 한다.

#1. 풍수상 왕기(王氣) 흐르는 전주

전주(온고을)는 노령산맥에서 뻗어 내린 기린봉, 승암산, 고덕산, 모악산 등으로 둘러싸인 분지형태로 사람 살기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다. 다만, 서북쪽이 열려 있어 풍수지리적으로 이를 비보하는 장치들이 마련됐다. 덕진제방, 숲정이, 진북사 등이 그것이다. ‘건지산(乾止山)’이라는 명칭도 그렇다. 북서쪽으로 건방(乾方)에 속하므로 서북쪽으로 빠져나가는 기운을 막기 위해 건지산이라 칭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 등 조선의 지리서들에는 진산이 건지산이라 기록되어 있다. 원래는 ‘백호(白虎)’를 의미하는 ‘승암산 기린봉’이 주산이라는 것이다. 기린봉이야말로 기골이 장대하고 주산으로서 품격을 갖추고 있다는 것. 왕(王)의 기운이 흐르기 때문에 이 기를 누르기 위해 조선왕조는 일부러 주산을 건지산으로 잡았다는 설이 있다.

결국, 전주에는 왕기가 흐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전주는 일찍이 견훤대왕이 왕도를 펼쳤던 후백제의 도읍지로, 전주이씨의 태조 이성계가 건국한 조선왕조의 발원지다.  

#2. 후백제 견훤대왕 도읍지, 전주

‘(내가) 목적하는 바는 평양의 누각에 활을 걸어놓고 말에게 대동강의 물을 먹이는 것이다.’

후백제 견훤왕이 고려 왕건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견훤은 대동강 이남의 삼한을 재통일하려는 웅지와 포부, 그리고 자신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상주 가은현 출신으로 서해안을 지키는 비장이었던 견훤은 892년(신라 진성여왕 6년) 무진장(광주)을 공략하여 세력확장의 발판을 마련한 후 900년 전주로 거점을 옮겨 국호를 ‘백제(百濟)’라 하고 ‘왕(王)’이란 칭호를 자칭했다. 견훤왕은 이후 교통과 군사적 요충지인 ‘전주’로 진출해 승암산 기린봉 자락 ‘성황사’ 위에 궁터를 축조했다. 승암산 왕궁터 추정지에서 ‘전주성(全州城)’ 명문의 한 쌍 봉황무늬가 새겨진 암막새와 숫막새, ‘관(官)’ 자가 새겨진 기와 등이 출토된 유물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견훤왕은 호탕한 성격에 중국과 일본 등 이웃국가들과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3. 조선왕조 발원지 전주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조선의 풍패지향(豊沛之鄕)이다. 풍패(豊沛)란, 건국자의 본향을 일컫는 말로 한나라를 세운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데서 비롯됐다. 전주이씨의 시조는 통일신라 문성왕(재위 839~857) 때 사공(司空) 벼슬을 지낸 이한(李翰)으로 여러 문헌을 종합해보면 태조 이성계의 선대는 전주 지방의 토호로 추정된다.

조선은 건국 직후 태조어진을 모신 경기전을 설치하는 등 전주가 왕실의 본향임을 분명히 했다. 현재 전주문화유산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경기전, 조경묘, 조경단, 오목대, 이목대, 객사, 풍남문, 전주사고 등도 풍패지향과 관련되거나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역사유적들이다. 그러나 경기전을 제외한 나머지 유적들은 조선후기에 건립됐다. 풍남문이라는 편액과 조경묘 조성은 영조때 이뤄졌다. 객사를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 명명한 것도 이때다. 오목대, 이목대, 조경단 등은 조선말 고종 때 건립됐다.

조선말로 가면서 풍패지향 전주에 대한 조선왕실의 관심이 증폭되었고, 조선왕조가 왕실의 뿌리를 굳건하게 하려 하였음을 의미한다.

#4. 조선왕조실록 지켜낸 전주

조선왕조실록은 태조 때부터 철종 때까지 총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 조선의 정치경제, 사회, 문화 등 당대 사회의 제반 사항이 총망라됐는 이 실록의 분량은 1893권에 888책에 이르는 방대한 역사서다. 세계사적으로도 그 유례가 드문 우리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으로, 1997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세종 27년 조선왕조실록은 전주성 내 승의사(僧義寺)에 보관했다. 1464년(세조 10년) 승의사에서 객사 후원의 진남루로 실록을 옮겨 보관했다. 이후 1473년(성종 4) 경기전 동편에 전주사고(全州史庫)를 건립했다. 임진왜란 직전 전주사고에는 태조 대부터 명종 대까지의 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각종 문헌 총 1344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전주성이 위험에 놓이게 되자, 경기전 참봉 오희길, 태인(泰仁)의 선비 손홍록(孫弘祿)·안의(安義) 등이 태조어진과 실록을 정읍 내장산의 은적암(隱寂庵), 용굴암(龍窟庵), 비래암(飛來庵)으로 옮겨 보관했다. 실록은 이후 정읍 아산, 해주, 강화도, 평안도 안변의 묘항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져 왜란이 끝날 때까지 보관됐다. 

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유일본인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하여 태조부터 명종실록을 다시 출판해 서울의 춘추관, 강화도의 마니산, 경북 봉화군의 태백산, 평북 영변의 묘항산, 강화도 평창군의 오대산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관했다. 전주사고본은 마니산에 보관됐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조선총독부에 옮겨지고, 적상산본은 구황실 장서각에 옮겨졌다. 오대산의 실록은 일본에 반출되어 동경제국대학에 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 때 불타버렸다. 적상산본은 1950년 6·25 당시 북한측이 가져갔다. 그리하여 현재 국내에는 정족산본(원 전주사고본)과 태백산본이 남아 있다. 전주사고본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있다. 

 #5. 왕도인의 자긍심 갖자!

세계적으로 문화지수가 높은 도시들의 공통점은 지역민들의 높은 문화자긍심이다. 이탈리아 로마 시민이 그렇고, 체코 프라하와 체스키크롬로프 시민이, 독일 드레스덴 시민이, 스페인 바르셀로나 시민이, 스위스 루체른 시민들이 그렇다. 이들의 공통점은 자신들의 역사문화를 높게 평가하고 보존하기 위해 노력한다. 나아가 문화를 즐긴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행정이 중심이 아니라 시민이 주인이다.

전주 정체성 확립으로 시민의 자긍심을 높여 나가야 한다. 후백제 도읍, 조선왕조 발상지, 동학농민혁명 집강소 설치 등의 역사적 정통성을 바탕으로 전주가 한국정신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도시로서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고 전주정신을 정립해 시민의 자존감을 높여가야 한다.

나아가, ‘전주다움’을 바탕으로 전통관광을 확대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선 한옥마을과 전주부성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도록 행정적 관리를 강화하면서 전통가교 조성, 전주부성 역사문화창조 재생프로젝트, 전통문화 대표공연 육성, 핸드메이드 시티를 추진해 1000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도시로 확고히 자리매김해야 한다.

한성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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